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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칼럼] 어느 이발사 이야기

성기노 기자 |2020-06-0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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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클립아트코리아)



점심시간에 은행일을 잠시 봤다가, 내친 김에 머리를 깎으러 갔습니다. 몇년 전 단골집을 잃은 후 그냥 발길 닿는 곳으로 갑니다. 처음가본 한 동네 미용실이 휴무더군요. 그 맞은 편에 '이발관'이 눈에 띄었습니다. 언제부턴가 머리는 미용실에서만 깎았는데, 오늘은 동네 이발관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커트 7천원의 착한 가격입니다. 예상대로, 흰 가운을 입은 할아버지가 앉아서 신문을 읽고 계십니다. 들어가서 인사를 꾸벅 하니, 바로 자리로 안내하십니다. 아마 이 자리에서 수십년은 이발을 해주셨을 것 같습니다.


앉자마자 할아버지의 폭풍 이야기가 쏟아집니다.

"여기 처음이에요?"(반말인지 존댓말인지 잘 구분이 안 됩니다)

"네"


연신 싱글벙글 웃으십니다. 손님이 없어 무료하던 차였는가 봅니다. 군생활은 5사단에서 했는데 그때도 이발병이라 편했다는 이야기. 머리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면 단골을 정해놓고 그곳만 가야 한다는 이야기. 미용실에서 실패한 머리로 울상을 지으며 찾아오는 젊은이의 머리를 말끔하게 '수리'해줬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으십니다. 할아버지는 서울에서도 경기도에 가까운 이 도봉구 방학동에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걱정도 하셨습니다.


이발관에 비해 미용실 요금이 요즘은 너무 비싸다며 푸념도 하십니다. 7천원의 2배를 받는 미용실이 대부분이라며 불만을 얘기하시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십니다. 평생을 이발만 해오신 분의 여유로움이 느껴집니다. 하루에 한명의 손님을 받아도 그렇게 애걸복걸하지 않을실 듯합니다. 도봉구 방학동의 한 이발소는 이렇게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는 군대 가기 전에도 이발로 먹고 살았다며 자신의 기술을 은근슬쩍 자랑하십니다.


내심 오늘은 좀 달라보일까 기대를 하며 머리를 맡깁니다.


바로 바리깡부터 잡으십니다. 아, 이게 아닌데...넘나 짧게 깎으실까봐 살짝 겁이 났습니다. 으레 묻는 스타일 질문에 "조금만 다듬어주세요" 하며 얼버무렸습니다.


그래도 바리깡 놓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가위를 들고 쳐내기 시작하십니다. 조금도 주저함이 없으십니다. 시원한 가위질에 내 마음은 쪼그라듭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머리를 감겠다고 하니 직접 감아주십니다. 이발소와 미용실의 머리감기 차이가 뭔지 아시는지요? 이발소는 머리를 숙이고 감습니다. 미용실은 드러누워야 합니다. 이것의 차이를 오늘 알았습니다. 이발소는 자세가 편한 대신, 얼굴에 물이 다 묻습니다. 아마도 미용실은 화장하신 여성분들을 배려하신 것인지 얼굴에 물이 하나도 묻지 않게 눕혀서 감겨줍니다.


네, 얼굴에 물이 묻으니, 시원하게 세수를 해야 합니다. 머리깎으며 세수를 해본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미용실은 머리를 감은 뒤 다시 의자에 앉아 뒷정리를 해주십니다.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습니다. 수건으로 대충 물을 털고 기다렸지만 드라이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재용 로션을 내주시고는 그냥 보고만 계십니다. 저는 로션을 조금만 찍어 바르고 계속 기다렸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말 없는 시간이 오갑니다. 더 분위기가 어색해질 때쯤 알아차렸습니다. 이발관은 뒷정리 같은 건 없나봅니다. 어정쩡하게 바로 일어납니다. 할아버지의 시간은 언제나 느립니다. 그냥 기다려 주십니다. 계속 웃으십니다.


얼마냐고 물었지만 그 전에 7천원 가격 자랑을 하셨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 드립니다. 잔돈을 받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는데 할아버지가 "또 와요~" 하십니다. 의례적인 인삿말이 아니라, 도봉구 최고의 이발기술자인 할아버지에게 다시 오는 게 당연하다는 듯 자신감 있게 말씀하십니다.


이발관을 나와 셀카를 찍어보았습니다. 별다를 게 없습니다. 사는 게 별다를 게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걱정하신 이재용 부회장의 머리도 결국 가위가 자릅니다.


제게 별다르게 다가온 건, 평생 한 가지 직업으로 유유자적하며, 느리게 살아오신 할아버지의 평범한 삶이었습니다. 욕심 내지 않고 그냥 그렇게 보통의 삶을 살기가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의 일상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유리창에 비친 머리를 언뜻 보니, 지금까지 자른 스타일 중에 가장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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