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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노 편집장 칼럼] 김종철 선생이 꿈꾸었던 세상

성기노 기자 |2020-07-2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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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김종철 선생은 2020년 6월 25일 새벽 작고했다. 그는 1970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한 뒤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다 생태운동가로 활동해왔다.(사진=연합) 



딸아이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수록 나는 마음이 급해진다. 코로나19로 인해 일주일에 이틀만 학교를 가는 것도 안쓰러운데, 학교에 가면 로봇처럼 가만히 앉아있어야 해서 재미가 없다고 불평을 한다. 옆 친구와 지지배배 수다를 떨어도 안 되고 운동장에서 마음 놓고 뛰어놀 수도 없다고 한다.

 

친구들과 친해질 수도 없어서 답답하다는 딸아이를 보면서 마음이 자꾸 조급해지는 건,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환경 재앙이 찾아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먼 훗날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내 두려움의 절반 이상은 찾아오지도 않는 불행을 예상해 지레 걱정부터 하는 것이라고 해도, 코로나19를 접하면서 환경과 미래에 대한 나의 고민은 점점 구체적인 공포와 절망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 아비의 본능적인 부성애라고 치부하기에는 지금의 코로나19 사태는 생활의 불편함을 넘어 암흑천지 미래를 암시하는 불길한 전조같다.

 

대학 때 선배의 집에 가면 으레 서가에 꽂혀 있던 녹색평론에 요즘 자주 눈길이 가는 것도 코로나가 던져주는 환경재앙의 두려움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인류가 멸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과몰입의 결과로 녹색평론 과월호를 구입하고 정기구독을 충동구매 했다. 그렇다고 환경이 뭐 그렇게 달라질까만은, 괜히 녹색당은 지금 어떻게 활동하고 있을까 검색도 해보게 된다(녹색당은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창당되었으나, 비례대표 선거에서 0.48%의 득표율로 정당 해산이 결정된 후, 20121013일 녹색당더하기로 재창당 되었다.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비례대표로 58,948표를 얻어 득표율 0.21%를 기록, 한 석도 얻지 못했다).

 

정치라는 게 별다른 게 있을까. 사람들을 편하게, 걱정 없이 살게 해 주는 것 아닐까. 공동체의 작동방식을 만드는 최소한의 합의 시스템이 정치라고 볼 때 지금의 정치는 나를 깜짝깜짝 두려움에 떨게 하는 코로나와 환경재앙의 공포로부터 얼마나 자유롭게 해주고 있을까. 기대도 하지 않지만, 온갖 비생산적인 이슈로 허송세월하고 있는 여의도를 볼 때마다 나라도 정신 차리며 환경을 생활의 일부로 끌어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종철 선생은 1991년 사재를 털어 생태.인문 격월간지 '녹색평론'을 창간해 지금까지 발행해왔다. 그의 분신이자 지식의 창고였다. (사진=성기노 기자)



녹색평론으로 촉수가 이동하면서 슬픈 뉴스 하나를 접했다. 생태운동가 김종철 선생이 지난 625일 새벽 타계했다는 것이다. 194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1970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1980년부터 영남대 교수로 강단에 섰다. 교수 재직 중인 1991년 사재를 털어 생태·인문을 다루는 격월간지 녹색평론을 창간했다. 고인은 2004년 교수직을 내려놓고 생태 운동에 전념해왔으며, 2011년에는 녹색당 활동에도 참여했다.

 

김종철 선생의 사상과 철학이 가장 필요한 세상이 오고 있는데 그는 황망하게 저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김종철 선생은 녹색평론을 통해 어울림과 공생을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 공생적 문화가 어떻게 하면 잘 유지될 수 있을까 평생 고민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과 사람의 공생, 사람과 자연의 공생 텃밭을 평생 일구며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가 지향했던 것은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삶이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인간과 인간이 우애롭게 지내며, 각 개인이 내면의 평화를 누리는 그런 삶이었다. 그는 공생공락을 위한 이상적인 사회로 농()의 세계와 촌락 자치를 주장했지만 이는 결코 복고 취미가 아니었다. 공생공락을 위한 세계 각지의 여러 움직임들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연구하면서 이끌어낸 통찰이었다.” (프레시안 [김종철 선생을 기리며] 협동적 자치의 공동체를 향하여에서 발췌)

 

김종철 선생이 떠나간 후 그를 추모하는 글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의 청빈한 삶도 추모하지만, 그가 그리려 했던 진정한 행복 공동체에 대한 갈망과 절박함이 더 짙게 배어 있는 글들이다. 김종철 선생이 미처 다 갈지 못했던 공생공락의 텃밭을 남은 자들이 마저 일궈야 한다는 애절한 소망도 결론에 꼭 포함돼 있다. 코로나 사태 뒤 건강이 나빠진 그는 외부 기고(417일 <한겨레> 칼럼을 끝으로)와 강연을 모두 중단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이틀 동안 나눈 말과 글 중의 한 대목을 통해 나는 작은 희망 하나를 보았다. 딸아이에 대한 작은 근심 하나도 마음 한켠에 접어둘 수 있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몹시 더운 날들입니다. 6월 기온으로는 사상 최고라죠. 시베리아가 뜨거운 시베리아로 되고 있다니, 무섭습니다. 나는 때때로 인간이 어떤 식으로든 다 사라진 후의 지구의 풍경을 그려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인간 중에는 굉장히 강인하게 살아남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어떤 형태로든 삶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무리 중에 적어도 나는 포함되지 않겠지만.”

 

일면식도 없는 김종철 선생이 내게 준 보석같은 선물이자 영원히 간직해야 할 희망 한조각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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